2021.3.13 삼성산 숨은암
[좌벽에서는 영화 속 부자들 쇼핑 장면의 클리셰처럼 윤수에게 이길저길 선등을 주문했다.]
내가 등반이 있는 날이면 의식처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버스정류장 근처의 토마토김밥에서 김밥을 사는 것이다. 24시간 운영하는 이곳에 가면 내게는 여느 때보다 일찍 일어나는 특별한 날임에도 차분하게 일상을 준비하고 계신다. 그 아늑하고 따뜻한 빛이 감도는 공간에서 김밥을 사서 나오면 동이 트기 전 그 푸르른 기운과 차가운 새벽공기가 괜스레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삼성산은 관악산과 붙어있지만 우리는 경인교대 쪽을 통해서 들어가게 된다. 내가 사는 녹두에서는 6515번 버스를 타면 한 번에 갈 수 있고 한 20분이면 도착해서 실재로 먼 거리도 아니다. 그런데 서울시민(Seoulian)은 서울 외의 지역을 모두 오지로 느낀다고 했나 환승을 두 번이나 해야하는 북한산과도 심적인 거리감이 비슷하다. 더군다나 경(기)인(천)교대라니.! 이런 심리적 거리감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작용한 걸로 보이고 원래 예정되어 있던 6명에서 한 명이 시간 상 포기하고 두 명은 지각하게 되었다. 먼저 도착한 셋이서 서로 준비한 간식을 나눠 먹는데 마치 소풍 온 느낌이다. 그러고보니 어렸을 때 엄마가 소풍 때마다 다양한 재료를 넣고 김밥을 싸주셨다. 각종 채소와 치즈 소고기 등을 꽉꽉 채워 넣은 그야말로 어머니의 사랑 뭐 그런 것이었는데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햄이 아닌 것에서 진정한 김밥이 아닌 것 같아서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은 가공육이나 배달음식을 거의 먹지 않고 엄마가 원재료로부터 손수 요리해주신 음식들만을 거의 먹었는데 그래서 그런가 그 어린 시절부터 문화적 다양성을 향유하지 못하고 한국적인 것에 머무른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김밥이라는 소재 때문에 말이 조금 길어졌다. 이제 반쯤 독립한 나는 그냥 가장 단촐하고, 어렸을 때 내가 생각했던 정석적인(legitimate) 김밥을 산다.
숨은암이라는 말에 걸맞게 어프로치가 쉬운 듯 어렵다. *정정: 걷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찾는 게 어렵다. 하지만 든든하신 윤수대장님을 따라가니 바위가 갑자기 짠하고 나타난다. 우리는 지난번처럼 중앙벽(?) 우측에 있는 가장 쉬운 길(5.9)부터 등반을 시작한다. 나는 그 길은 스킵을 하고 그 바로 옆의 5.10a 길을 후등한다. 볼더링과 비슷한 느낌으로 홀드는 괜찮은 대신에 초반에 오버행을 넘어가야하는 길이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어려웠지만 이번에는 힘을 아껴두었다가 처음으로 올라가니 할만한 것이었다. (으쓱)
사람들이 점점 올라와서 우리는 좌벽으로 갔다. 지난번에 했었던 쉬운 길들을 바탕으로 온라인 쇼핑하듯 윤수에게 이것-이것-이것 주문을 했고 윤수는 그걸 묵묵히 다 걸어주었다. 좌벽에는 재미있는 길이 두개 있다. 하나는 또 오버행을 넘어가는 길인데 작은 홀드를 잡고 몸을 당기는 동작이 핵심이다. 그 동작을 치는 부분은 바위가 둥글게 튀어나와있어 어설프게 했다간 온몸으로 바위를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만다. 나는 팔꿈치를 접으며 올라가기보단 어깨를 최대한 당기며 (아웃사이드 스탭으로 등반할 때 이게 잘 되던데) 올라가니까 편한 느낌이었다. 이 길 역시 지난번에는 정말 추하게 (위에 말했던 바위를 끌어안는 모습이 사실은 나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올라갔는데 이번엔 그래도 그럭저럭 올라간 것 같다. 역시 익숙한 길과 그렇지 않은 길에는 체감난이도에 차이가 큰가보다.
우리가 간 길 중 가장 좌측에 있는 그 길은 10b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길이다. 페이스 루트여서 자그만한 발홀드를 잘 딛고 일어나야 하는 길인데 윤수가 대뜸 내 신발이 별로라고 얘기하며 자기 신발을 권유하였다. (사실 귀찮아서 좀 많은 대화가 생략되었다.) VSR이라는 반쯤 스포츠클라이밍 용 신발이었는데 확실히 발가락이 내 신발처럼 구불어지지 않고 끝에도 고무가 잘 마감이 되어있었다. 그 신발을 신으니 그 전 신발로는 그냥 숫돌처럼 갈려나갔을 그런 지점에서도 발이 딱 고정이 되는 것이었다. 물론 윤수와 발사이즈 차이 때문에 살짝 헐렁한 감은 있었지만 그것을 감수하고도 내 신발보다야 훨씬 좋았다. 신발이 등반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배운 건 좋았지만 한편으로 2년을 함께해온 신발에 믿음이 떨어져버린 것은 이후 내 등반때마다 내 심리에 안좋은 영향을 미쳤다. 빨리 신발을 사면 되는 것이었겠지만 시간이 없는걸~..
아무튼 윤수의 신발덕에 생각보다 수월하게 그 길을 마치고 우리는 우벽으로 향했다. 내가 좋아하는 슬랩 루트가 포진한 곳이었다. 이전에도 가본 곳이었지만 사실 어려울만하면 크랙을 잡았기 때문에 제대로 올라갔다고 할 수 없었는데 이번에 윤수의 지도하에 무엇을 밟을지를 잘 보고 가니 드디어 제대로 등반한 느낌이었다. 다들 욕심이 많아서 원래 우리가 하산하기로 한 시간보다 늦게 내려오게 되었다. 참 알찬 시간이엇다~ 일기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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