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7 삼성산 숨은암
중앙대 산악부 분들과 함께 삼성산을 가게 되었다. 성훈이가 몇 주 전에 와봤다며 자신 있게 선등을 섰다. 나는 경태와 성훈이가 걸어주는 길을 편하게 올라갔다. 사실 길이야 무난했다. 쉬운 길도 있고 볼더링-스러운 길도 있고 어려운 길도 있었다. 크랙을 뜯는 길부터 페이스, 슬랩코스까지 다양했다. 멀티피치마냥 꽤 올라가는 길도 있었다. 그야말로 잘 갖춰진 자연암장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좋아하는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톨스토이는 이렇게 얘기한다: Happy families are all alike; every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마음에 드는 한글본을 찾을 수 없어 영어를 들고 왔는데 결국은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모두 비슷하지만(구성원이 건강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등) 불행한 가정은 각각 불행한 양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를 암벽에도 대입해볼 수 있다. 바위가 “좋은” 암장이 되기 위해 갖춰야할 조건은 대충 존재한다. 잡을 만한 홀드가 있어야할 것이며 어프로치가 짧고 다양한 등반방식과 난이도를 선사해야할 것이다. 만약 이런 checklist에서 하나라도 벗어난다면 너무 멀거나 진부하거나 혹은 그냥 등산할 때 보이는 웅장한 바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역설적으로 얘기하고 싶은 건 삼성산 숨은암이 “잘 갖춰진” 코스인만큼 다른 자연암벽 코스가 주는 그런 울림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한 길을 가며 깨달음을 얻는다는 등의 종교적 교훈을 얻었다, 는건 과거 웅변대회(?)에서나 볼 법한 결론인 것 같고 다시한번 실내암장vs멀티피치의 싸움에서 멀티피치를 옹호하는 근거를 얻은 느낌 정도이다.
오늘의 보고서는 이것 대신 화장실을 가려고 하산했다가 숨어버린 숨은암을 찾기 위해 2시간 가까이 헤맸던 얘기를 하고자 한다 (부제: 똥싸러_갔다가_두시간만에_돌아온_썰.txt). 우리는 청명한 가을 아침의 날씨를 즐기며 암벽을 타고 있었지만 내 속에는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진 않았지만 시커먼 먹구름을 보면 그 무게감이 느껴지듯 내 속에서도 천천히 그 무게감이 더해가고 있었다. 나는 안전을 위해 먼저 해결해야할 일이 있음을 느꼈는데 다른 친구들의 조언처럼 산속에서 해결하는 건 나로서는 어려운 선택지였다. 마침 어프로치가 길지 않았고 또 완만했기에 삼성산 입구로 돌아가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으로 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하게도 동행자가 생겼다. 지원누나라고 그전에 한번인가 보고 말을 제대로 해보는 건 처음인 사이였는데 그래서 그런가 내려가기 시작한 무렵에는 가벼운 얘기들을 하며 걸어갔다. 하산이 뭐가 어렵겠어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은데 어려웠다. 갈림길은 더 적지만 올 때 갈림길이 아니었던 곳이 갈 때는 여러 갈래로 찢어져 있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기억과 (사실 제일 못 미덥다) 사람이 다닌 흔적과 방향 등을 고려해 일단 아래로 난 길을 고르게 되는데 불안감이 계속 따라온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할 것이 나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다. 사사로운 얘기를 나누며 길을 걷고 있으면 이따금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불과 두 세시간 전의 산행에서 내가 기억하는 거라곤 마른 계곡을 따라 걷다가 중간에 건너가야한다는 것이었다. 등산로 초임에서 가드레일을 넘어가면 계곡이 흐르던 자리가 있고 이를 건너서 나오는 흙길을 따라 올라왔던 것이 기억에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전혀 거리감을 가늠하지 못한 채 “이제 건너야하나?” 말 만을 반복하며 걸어내려오다가 무슨 댐구조에 도착해서야 우리가 너무 많이 걸어왔음을 깨달았다… 어느새 생겨버린 철조망 넘어엔 계곡은 너무 깊어져 있어서 그 아래로 내려갔다 올라오는 건 어려워 보였고 댐 구조물 위를 건너가자니 거의 외나무타기 정도의 폭이라 무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멀쩡했던 길이 있었는걸.. 그러고보니 오던 중에 지원누나가 여기서 건너야하는 게 아니냐고 했었는데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아서 계속 걸어왔었다. 설마 거기에서 건넜어야 했던건가! 어느 세월에 돌아가나 했지만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서 이번엔 제대로 건너갔다. (중략) 다시 돌아가는 길은 한결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설마 오전동안 두 번 다녀간 길인데 또 길을 잃겠냐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어느새 정상을 향해 가고 있음을 깨달은 후 높은 곳에서 보면 보일까 해서 숨은암을 찾고 있다.] 그랬던 생각이 무색하리만큼 우리는 제대로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쯤되면 굳이 말 안해도 되겠지만 나와 지원누나는 놀라울 정도로 온 길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나마 지원누나가 조금 더 기억을 잘 했는데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옛말은 비교문도 성립하나보다. 무식할수록 용감했다. 본적도 없는 길을 분명 봤다고 여기가 맞다고 하며 용감하게 걸어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는데도 도착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까는 이렇게 힘들지 않았던 것 같은데 계속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고 흙길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바위투성이이다. 지원누나는 계속 길을 의심했고 나도 이건 아닌데 싶었지만 한동안 갈림길이랄 것도 없어서 제대로 들었겠거니하며 더 올라갔던 것 같다. 우리가 길을 잘못들었음을 시인한 때는 갑자기 탁트인 산중턱에 도착했을 때이다. ㅋㅋㅋㅋ 분명 숲 속에서 걸어다녔던 것 같은데 어느새 정상이 보인다. 한참 잘못되었음을 느꼈지만 정상이 너무 코앞에 있던 탓에 그냥 정상까지 다녀올까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아 무엇이 사람을 길치로 만드는가. 문명 속에서 나는 길치가 아니었다. 확실한 이정표들과 내가 보고 있는 방향까지도 알려주는 지도 어플 덕분에 가끔은 진짜 길치 친구들을 인솔하는 역할도 해봤었다. 하지만 그런 문명의 혜택을 한꺼풀 벗겨내고 나면 나는 영락없는 길치였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나는 길치들과 많은 특성을 공유했다. 왔던 길을 뒤돌아보면 새로운 길이 펼쳐져 있고 길을 찾기 위해 주변에 무엇이 있냐고 물으면 “가로수”라고 대답할 사람이다. 장애는 사회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라는 인상 깊은 말이 떠올랐다. 절대적인 것으로 보이는 장애라는 condition이 사실은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라니. 마치 이런 것이다: 심한 근시는 안경이 없다면 삶에 큰 어려움을 겪지만 안경의 발명 덕분에 더 작은 불편함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 나도 나의 불편함을 덜어준 과학문명 발달에 크게 감사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나는 여느 때처럼 산에서 참회를 하고 있었다. 잘못 온 길을 거슬러가자니 한걸음 한걸음이 아깝다. 언제 또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나. 그냥 경인교대 앞에서 기다릴까. 영섭이형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래도 누군가는 우리를 생각해주는 모양이다. 거의 그 건널목까지 와서야 제대로 된 길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자존심이고 뭐고 주위 분들에게 길을 물어가며 갔다. 또 산길을 알려주는 어플이 있다며 그것도 다운받았다. 지원누나는 그래 이 길이 맞는 것 같다며 점점 확신을 얻어가는 듯했지만 나는 이 길도 아까 그 길도 똑같이 가본 적 있는 것만 같은 길이다. 그래도 순조로운 것 같았지만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남아있었다. 바위에 숨은암이라고 빨간색 그래피티가 되어있었는데 그 방향이 가리키는 방향 그대로 갔다. 참고로 거기서는 길의 개념이 옅어지고 넓은 숲에 낙엽이 수북히 쌓인 느낌이었다. 이건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 그래피티를 무시하고 직진하면 더 편한 길이 있다고 윤수가 알려줬다. 하지만 나랑 지원누나는 그걸 모른 채 일단 그 방향으로만 올라갔다. 역시 길은 험했다. 틀리면 안되니까 에코도 크게 외쳐봤다. “하-야!” 답신이 왔다. 그래도 가까이 있나보다. 감격은 뒤로 한 채 높아지는 낙엽 더미를 해치고 올라갔다. 나뭇가지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가파른 턱을 넘고 올라가니 빛이 나왔고 좌벽과 중앙벽이 만나는 곳 쪽으로 나올 수 있었다. 농대산악회 친구들은 점심을 거의 다 먹어가던 참이었는데 우리가 거기서 나오니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익숙한 얼굴을 보니 나는 마냥 반가웠다. 오늘도 동네 뒷산에서 히말라야 한편 촬영해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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