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7 인수봉 설교벽 - 고희산행
인수봉엔 참 많은 길이 있는 것 같다. 이번에 형님들 고희산행을 따라가니 설교벽이라는 숨겨진 길을 가볼 수 있었다. 다만 재학생들이 자주 가던 길이 아니다보니 길을 조금 헤매긴 했지만 오히려 모험을 하는 것 같고 더욱 재미있다. 오랜만에 와본 북한산은 가을 분위기가 물씬 났다.
장비의 보고인 반실에서 우리가 형님들 것까지 넉넉하게 챙겨갔어야 했는데 오랜만의 멀티피치라 헷갈렸는지 카라비너를 두 개를 챙겨야지하고 하나만 챙겼었다.. 결국 태완이가 여유분으로 가져온 것 하나를 받고 형님들께도 하나를 받고나서야 올라갈 수 있었다. 평소에도 부주의한 성격 때문에 이것저것 고생할 때가 많은데 산에 갈 때만큼은 나름 노력한다고 하는데도 가끔 이런 뼈아픈 실수를 하고 만다. 그래도 아직 지각은 한적 없는게 스스로 대견하다. (내 보고서가 자주 성찰을 넘어 자기연민과 무력감을 보인다는 평가가 있어 긍정적인 부분도 끼워넣는다.)
나는 완수형님이 이끌어주신 길을 가게 됐는데 1피치는 요령을 몰라 힘들게 갔다. 2피치 때는 형님이 이것저것 자세를 교정해주셨는데, 가령 나는 좋은게 보이면 그걸 밟으려고 허리까지 오는 홀드에도 발을 올리고 그랬지만 슬랩은 오히려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야 된다는 것, 팔과 다리를 쭉 피라 하신 것 등이 기억난다, 원론적인 내용이고 이전에도 다 들어봤던 내용이지만 드라마틱한 효과가 있었다. 앎에도 층위가 있다던데 이게 동작을 체화함에서 온 다른 차원의 앎인건가 싶다가도 지금 하라고 하면 또 잊어버렸을 것 같아서 그냥 convincing messenger 덕분인게 아닌가 싶다. 그 때 그 자세를 기억할 수 있다면 그 후로의 등반이 한결 수월했을텐데.
나는 후등으로 갔지만 선등자는 정말 어렵고 무서웠을 것 같다. 전반적으로 볼트도 별로 3피치였나는 한 10미터 15미터 동안 볼트가 하나 있었다. 볼트 없이 그 거리를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뒤로 매달린 자일의 무게마저 원망스러울 것이다.
산책을 떠나신 만식이형님까지 포함해 네 갈래길로 흩어진 농대산악부는 어느새 다시 모여 우촌식당에서 식사를 함께했다. 우리는 메인 테이블 옆 4인용 테이블에 앉아서 얌전히 술을 마셨는데 어쩌다보니 진탕 취하게 되었다. 몸이 피곤했던게 컸던 것 같고 또 그 자리에 계셨던 경모형님/회장님이 입부 1년만에 대학원생이 되어버린 내 사정을 긍휼히 여기시어 융통성 있게 정회원의 길을 열어주심에 감사하였나이다(?) 그러다보니 취하게 되었더라는 얘기이다. 우이신설선을 타고 영섭이형에게 내가 많이 취했음을 어필하며 철의형님이 주신 술을 마시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식으로 핑계를 대고 있었는데 바로 옆자리에서 철의형님이 그 얘기를 들으시고 “내가?”라고 반문하셔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정말 신출귀몰하시는 분 같다. 또 앉은 자리에서 졸다가 눈 앞을 보니 범진형님이 서 계셨다. 언제부터였던거지? 나는 육성으로 화들짝 놀라며 자리를 비켜드렸는데 그걸 보고 있던 성훈이가 만화 캐릭터마냥 킬킬대며 비웃었던 것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결국 성훈이는 4호선 갱웨이 입구에 앉아 목이 90도 꺾인 채로 잠에 들었다. 누가 더 추했나 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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