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내 나이 예순 가까워옵니다. 돋보기를 걸쳐도 글씨가 가물거립니다. 손잡이 확대경이 필수품 되었지요. 요즘은 하루가 멀다고 머리카락이 한줌 씩 빠지고요. 하룻밤 지날 때마다 몸이 그전 같지 않습니다. 지하철이나 버스간에서 젊은이들이 재빨리 자리를 내어주곤 하지요. 그런데 그 젊은이의 눈초리가 여간 곱살치 않더군요. 그럴 때마다 나는 고개를 떨굽니다. 어쨌거나 살같이 흐르는 세월은 나에게 조금은 섭섭합니다. 사람은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세월을 결코 속일 수 없지요. 산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만큼 점잖고 의젓한데.

     사람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모두들 늙을수록 말이 많아 질 뿐 아니라 몸가짐이 흐트러져 볼꼴 사납습니다. 괜히 하찮은 일에도 예닐곱 살 철부지처럼 투정부립니다. 늙으면 주책망나니 되지요. 게다가 자기 것만 챙기고 남에게는 베풀 줄 모릅니다. 툭하면 늙은이들은 이제 죽어야겠다고 되풀이 말합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더 오래 산답니다. 이 모습을 보고 감나무 끝자락에 앉아있는 참새가 깔깔 낄낄 웃지요. 뒷골목 걸어가는 누렁이는 "멍멍" 크게 꾸짖고요. 그럴까봐 요즘 나는 몸조심, 말조심에 눈 조심합니다.

     내 주위에 아들딸 같은 젊은 산꾼들이 아버지뻘 되는 날더러 "형, 형님, 선배님."이라고 부릅니다. 산과 산 친구들이 그렇게 가르쳐주었답니다. 모두들 그렇게 불러주길 바랩니다. 산길에서 그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왠지 모르게 흐뭇하고 살맛 납니다. 그 친구들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은 누구에게나 순박하고 실하디실하지요. 더군다나 빈말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가진 건 없어도 언제나 어디서나 마음이 넉넉해집니다. 맞습니다. 누가 뭐라도 나는 아들딸 부자입니다. 남들이 무척 부러워하네요.

     이제 머지않아 내 나이 팔순 될 겁니다. 애기고사리 같은 손녀, 손자 산꾼들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형, 형님, 선배님."이라고 성가시게 부르겠지요. 내 깜냥으로는 그저 아이들의 소꿉동무가 되어주는 일이겠지요. 그래서 늙으면 모두들 어린애가 된다고 말합니다. 꼬부랑 늙은이가 고 녀석들의 꽁무니 뒤따라 지팡이 디디고 느릿느릿 걸어서 하늘재를 넘어갈 수 있을까요. 또 인수산장 샘터에서 약수 한잔 들 수 있을까요. 내친김에 백운대 산꼭대기를 한번 올라갈 수 있을는지요.

     너무 힘들어 오르지 못하면, 아예 욕심일랑 부리지 말고 우이동 길목에서 해질녘까지 마냥 기다릴 겁니다. 스무살 무렵 학창시절에 잠겨보고……어느 선배한테 얼빠지게 야단맞아가며 배낭을 예쁘게 꾸렸고. 어느 강의시간에 땡땡이 부리며 바윗길 오르면서 짜릿한 기쁨을 맛보다가 떨어져 죽을 뻔했고, 어느 때 눈사태로 친한 산꾼들을 잃었고, 또 어느 때 에베레스트 오르는 꿈꾸었고……이런저런 옛 산행을 돌이켜 그리다보면 뉘엿뉘엿 해가 저물 겁니다.

     밤하늘 별들이 하나 둘 씩 머리 위에 떨어지고 그 녀석들이 뛰어내려오면 단골술집으로 데리고 가서 도토리묵, 동그랑땡, 감자탕에 밥알이 둥둥 뜬 동동주 한 주전자씩 사 주어야겠지요. 그러다가 귀가시간이 다가오면 반달과 어깨동무하고 개나리고개 산 노래를 신나게 부르고요. 더 늙기 전에 지금부터 용돈을 두둑이 마련해두어야겠습니다. 손녀와 손자 볼 날을, 바로 그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