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66학번 강신영입니다. 산 편지 한 장 띄웁니다. 교정에 핀 목련꽃, 개나리꽃이 고개를 떨구더니 그 사이를 비집고 연보랏빛 라일락꽃 송이가 얼굴을 내밉니다. 엊저녁에 한줄기 봄비가 봄을 서둘러 재촉하면서 산중턱을 슬그머니 넘어갔습니다. 그대가 쓴 선인봉 산행후기를 읽으니 학창시절의 암벽등반 모습이 문득 떠오릅니다.

     꼭 35년 전, 1968년 새해 첫날에 눈 덮인 선인 측면 바윗길을 붙었죠. 톱으로 올라가던 나는 뜀 바위에서 머뭇머뭇했지요. 그때 오인광(62학번, 고인이 됐음)형님이 몸을 날려 건너편 바위에 손을 뻗어 사다리를 만들어주었답니다. 형의 등을 짓밟고 뜀 바위를 건너 바윗길을 계속 올라갔지요. 누군가 우리더러 미친 녀석들이라 말했죠.  

     "단 이틀의 산행이 지금껏 살아왔던 오랜 시간을 압도했다는." 그리고 "자연(自然)같은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 정말 기쁘다는." 말이 산을 찾는 필요충분 조건이 되겠죠. 그렇습니다. 학창시절의 산행 추억은 신(神)이 가꾼 국화꽃처럼 밀레가 그린 수채화처럼 아주 소중합니다. 곱고 아름다운 산 추억을 간직한 사람만이 거칠고 험한 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답니다.

     산길을 걷다보면 우리 마음을 촉촉이 적셔주는 일들이 곰비임비 일어나지요. 귓가를 가만히 스치어 지나가는 산새 울음, 머리 위에 사방으로 쏟아지는 바람과 햇살, 한 뼘의 텐트 한구석에서 꾸벅꾸벅 조는 연분홍 랜턴 불빛, 손 등에 우수수 떨어지는 작은 별들, 장대비 지난 뒤 산봉우리에 뭉게뭉게 핀 구름, 발끝에 부딪치는 돌부리와 나뭇가지와 구름바다, 갓 피어난 들꽃, 겨울밤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캠프 화이어 불꽃, 눈 덮인 산록에 휘몰아치는 칼바람……모두들 우리에게 산 친구들입니다.

     나는 그대에게 우리 나라 안에 있는 이런 친구들은 한번 만나 적어도 하룻밤을 머물기 권합니다. 눈길을 들어 먼 산을 바라보세요. 어느 산 어느 단풍나무 이파리가 제일 아름다운지, 어느 산 어느 골짜기의 물줄기가 가장 맑고 고운지, 어느 산 소쩍새가 그토록 슬프게 우는지, 어느 산꼭대기에서 달이 가장 먼저 떠오르다가 가장 늦게 지는지, 어느 산길에 어떤 들꽃이 예쁘게 피는지, 어느 산 어느 산동네에 복사꽃과 살구꽃이 어떻게 피는지, 어느 산 어느 고갯길에 눈이 가장 먼저 내리는지……그리하여 이런 풍경을 작은 수첩에 하나 둘 차곡차곡 담아두세요.

     예순 살 가까운 나는 겁 없던 스무살 학창시절에 즐겼던 암벽 등반과 장기 산행이 지금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 내 생애에 남은 날의 숫자가 우리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산의 숫자보다 턱없이 적을 뿐 아니라 산 하나 하나에 숨어있는 숨소리와 사랑과 꿈을 캐내기에 역부족하기 때문이죠. 또 그것을 끌어안기 위해서는 불편한 내 몸이 허락하지 않고 내 자신이 지금까지 누려온 산 사랑과 산 마음의 깊이가 터무니없이 얕기 때문이죠. 나는 다시금 스무살 적의 암벽 등반과 원정 산행을 가슴속에 하나씩 그려봅니다. 산은 그대에게 평생의 반려자(伴侶者)가 될 겁니다. 산은 누구에게나 위대한 스승입니다.

註: 재학생 소식 방에서 글모음 방으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