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의 김기홍 노수경에게

     33도의 폭염이 꽃구름 속에서

     자글자글 콩죽팥죽 들끓듯 했어

     밤마다 낮마다

     보리쌀 뜬 물이 흐르는 골짜기

     조팝나무 마루바닥 귀퉁이에서

     입술 시린 불바라기 쇳물을

     꿀꺽 꿀꺽 한 사발 들이켜고 있었지

     쥣빛 누더기에 장삼띠를 두른

     월정사 스님께서 나지막이 말해주었어

     이 골짜기의 맨 끝자락 마을에

     상투 틀고 탕건만 쓴 채 조선낫을 갈던

     대장장이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지

     이 골짜기를 오랑캐들이 웃으며 지나가다가

     보리쌀 뜬 물을 보고 두 눈이 휘둥그레져

     허겁지겁 삼십육계 줄행랑쳤다지

     되게 미련한 놈들이지

     되게 똑똑한 놈들이지

     내 아내 대학교후배인 국어 선생님이

     탐라도 촌놈의 뒷이야기 해주었어

     서둔골 푸른 대학의 학창시절에

     쉬는 날마다 자일 메고 산에만 오르다가

     큰 뜻을 하나 품고 태평양 건너가서

     미국 오리건 주립대학 농학박사학위 땄고

     이제나저제나 대학교수가 꿈. 꿈. 꿈.

     머지않아  

     오리나무 뒷구멍에도 해 뜰 날 있겠지

     언젠가 인수 취나드 오르다 떨어졌다지

     바로 다음 날 동틀 무렵에

     인수 취나드 산친구에게 악수를 청했다지  

     아빠보다 더 똑똑한 떡두꺼비 하나

     엄마 꼭 닮은 나팔꽃 하나 두었어  

     두 아이 별명은 "성후, 성윤"

     언제나 화사한 아낙이

     언제나 상냥한 아낙이

     풋고추에 호박쌈 땀나게 들면서

     집주인 자랑거리를 한 번 말해주었어

     서울의 어느 큰 회사 부장님이래

     황톳길 소달구지처럼 과묵했다지

     예닐곱 살 적에 보리밭두둑에서

     뚜우 뚜우 보리피리를 잘 불었다지

     지난겨울 싸락눈이 흐드러지게 내리던 날

     어르신을 꽃상여로 북망산에 모시던 날

     송이눈꽃 덮인 연자맷간 뒷뜰의

     언 땅을 내리치며 그렁그렁 울었다지

     그 친구는 보기 드문 산동네 효자라네

     난을 치듯 아내를 섬기는 애처가라네

     빨간 꽈리꽃 딸 이름은 "하린"

     주홍 동자꽃 아들 이름은 "지후"

     연 보랏빛 등나무 길

     흑석골 음대를 첫째로 나온

     하얀 미소를 짓는 아리따운 아낙은

     전공이 가야금인지 콘트라베이스인지 몰라

     언제 초례청 합환주에 맞절을 했는지 몰라

     그런데

     왕눈이 땅꼬마 하나만 덜렁 두었지

     박달나무 사랑방에서 칭얼대더니

     엄마옆구리에서 하얀 손수건을 목에 걸치고

     큰 밥주걱으로 이른 저녁을 먹고 있었어

     약밥 한 그릇, 약과 하나, 식혜 한잔 들더니

     그것도 모자라 산자 하나 더 달라고 보챘지

     고 녀석 손모가지가 내 절반이나 되었어

     고 녀석 진짜 이름은 "먹보 울보, 현우"

     20년 후배인 세 사람의 검객이  

     33도의 폭염이 조금은 가신

     반짝이는 별들을 배낭에 가득 담고

     초승달 데리고 九龍嶺을 넘다가

     솔나무 부지깽이에 걸려서 꼬꾸라졌어

     나는 호롱 술병 하나 더 비우며

     청사초롱불 밝히고

     초가을 체부를 기다리고 있었지.